“역시, 여전히 흐릿해.”
향긋한 피가 함뿍 섞인 침을 혀 위에서 맛보던 그녀는, 입 안에 집어넣어 빨고 있던 왼 손 집게손가락을 빼내어는 잔뜩 찌푸린 이맛살 위에 가져다 대었다.
여전히 기억나지 않았다.
이마를 짚은 집게손가락 끝 상처에서 핏방울이 샘솟아 그녀의 미간 사이를 지나 콧등을 따라 흐르다, 오른 콧망울 옆으로 빗겨흘러서는 입가로 향한다. 그녀의 혀가 반사적으로 그 핏줄기를 낚아채 맛보지만, 그녀의 기분을 나아지게 하기엔 여전히 부족했다.
“손가락이라도 잘라봐? 아냐, 역시 됐어.”
그녀는 걸터앉아 있던 녹슬고 찌그러진 도로 펜스에서 엉덩이를 떼어서는, 시선을 돌려 끝 없이 펼쳐져 있는, 망가진 차량들이 드문 드문 나뒹굴고 있는 도로 끝 지평선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 피 맛이라도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했는데. 아니, 좀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안개 낀듯한 이 기분이 가시질 않는단 말이야.”
오른 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 자루 끝의 쇳고리에 왼 손 집게손가락을 끼워서 빙빙 돌리며, 그녀의 혼잣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마와 코를 따라 자국을 남긴 핏줄기나, 아직도 생피를 뿜어내고 있는 왼 손 집게손가락이 뭐냐는 듯이. 그렇게 왼 손 집게로 묵직한 쇳덩이 날붙이를 빙빙 돌리던 그녀의 얼굴이, 갑작스레 생글거리는 미소를 띄며 확 밝아졌다.
“아, 그래! 역시 네 피를 마셔보는 게 좋겠어. 어떻게 생각해?”
마치 친한 친구에게 방금 들은 생각을 말하는 것 마냥, 홱 돌아선 그녀 앞에는 사지와 몸통 곳곳에 상처가 난 채 간신히 비칠거리는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사내 한 명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생글대며, 날붙이를 오른 손으로 다시 바꿔쥐고는, 사내 앞에 쪼그려 앉아 그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올려선 땀과 아스팔트 그리고 방사능 분진으로 더러워진 그의 목에 칼의 얼룩을 천천히 비벼 닦아내기 시작했다.
“왜 말이 없어? 누가 혀라도 뽑은 마냥.”
“으어어, 아으, 어으아으.”
“아, 그래. 내가 뽑았었지? 손가락도 그때 깨물렸고. 어때? 내 손가락 살점은 맛있었어?”
“아으, 아어으에오.”
“어머, 뱉어낸거야? 아깝게시리. 나같은 미녀를, 말 그대로 ‘먹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녀는 두려움에 찬 사내의 눈을 바라보다, 문득 그 두 눈을 뽑아내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 생각에, 등골에 한 순간 찌르르한 느낌이 타고 흘렀다. 사내의 동공에 손을 가져다댈까 하다가, 한 손은 사내의 머리채를 틀어 쥐고 있고, 다른 한 손에는 날붙이를 쥐고 있는 것에 생각이 미쳐서 그만두었다.
머릿 속 안개가 그녀의 단기 기억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고개를 한 번 저어 가벼이 떨쳐내었다.
“그래그래, 세상 만사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지. 뭐,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 내가 오늘 너한테 갑자기 시비가 털려서 기분도 안 좋고 한데, 네 피를 마셔보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거든. 어떻게 생각해? 확실히 효과가 있을 거 같지 않아?”
그녀는 이제 생글거리는 걸 넘어 만면에 활짝 웃음을 띄고는, 섬뜩하며 아름다운 안면을 사내에게 들이밀었다. 사내의 코와 그녀의 코가 맞닿을 듯 말듯했고, 그녀의 코와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숨결이 사내의 콧구멍을 간질거렸지만, 혀뿌리가 뽑혀나간 고통과 공포에 물든 사내에겐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저, 잘려나간 혀와 움직이지 않는 사지를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목숨을 구걸해보려 애쓸 뿐.
다행히도, 사내 앞의 여자는 그런 공포에 찬 반응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는 여자였다.
“아, 살려달라고? 네가? 길거리 위에서, 반반한 여자 하나 발견했다고 손에 든 쇠몽둥이와 발딱 선 좆몽둥이를 같이 휘두르며 달려들던 네가? 살려달라는 거야? 내 머리를 후려쳐서 골통을 깨부순 다음 버르적거리는 몸뚱이를 잔뜩 가지고 놀 상상에 젖어서는 바지 끝도 축축하게 적시고는 달려들던 네가?”
그녀는 깔깔 웃어댔다. 청량하고, 맑고, 섬뜩한 웃음소리의 칼날이 황무지 공기를 찢어발겼다. 그와 함께, 사내의 목에 비벼지던 날붙이의 날끝이 사내의 피부에 스며들었다.
“뭐, 그래 좋아. 살려주지.”
웃음 끝에 나온 그녀의 말에, 사내의 눈이 백열전구만치 크게 뜨이고, 입꼬리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오른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으지직, 촤악]
목에 통짜 쇳덩이 날붙이가 틀어박히는 소리, 날붙이 톱니가 핏줄과 뼈와 살점을 잡아 찢듯 가로지르는 소리, 피분수가 공기 중에 파도치는 소리, 목과 몸을 연결하던 살가죽이 우악스런 힘으로 뜯겨지는 소리.
“아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핫!!”
오른 손엔 날붙이를, 왼 손엔 뜯겨진 머리통을 들고는 미친 듯이, 아니 미쳐서, 완전히 돌아버려서는 연신 웃어제끼며 빙빙 돌아대는 그녀의 웃음소리.
어느 새 그녀는 날붙이마저 내던지고는 마치 사랑하는 연인의 손을 맞잡은 소녀 마냥 양 손으로 사내의 머리통을 붙잡고 제자리에서 돌아대었다. 그녀에게 붙들린 머리통의 두 눈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그녀의 맑은 웃음을, 너무나도 밝아 진저리가 나는 그녀의 웃음에 머리통이 붙들리듯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사내는, 그 순간 생각했다. 너무나도 얼토당토 않은 생각이었지만, 그 사내는 생각했다.
‘너무나 아름답다. 갖고 싶다. 가져서 마구..’
그걸 마지막으로 사내의 생각은 끊겼고, 그녀는 이제 숫제 쥐불을 휘두르듯 사내의 머리채를 쥐고는 빙빙 돌려대고 있었다.
그녀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던, 머릿속 안개는 몰려오는 상쾌함에 온데간데 없이 가신지 오래였다.
그녀는 옛 일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옛 일을 생각하려고 하면, 안개가 몰려왔다.
그녀의 기억력엔 문제가 없었다. 그녀는, 볼트를 나온 뒤로부터 겪었던 모든 삶의 순간 하나하나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이 흐려지는 부분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건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해 그녀는 왠만한 사람들보다 훨씬 기억력이 좋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옛 일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기억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녀는 그렇게 자주는 아니지만 옛 일을, 정확히는 볼트에서 냉동수면장치에 몸을 뉘기 전의 일을 기억해보려고 애썼다. 그럴 때면, 잔뜩 구겨진 꾸깃꾸깃한 종이 뭉치의 겉부분 마냥 몇 몇 상이 떠오르긴 했다.
캐나다의 사창가, 성난 사람들, 군인들, 난교, 깨진 유리창, 법정에서 교활하게 말을 쏟아내는 자신, 비열한 웃음, 사람들에게 받는 축하와 가식적인-역겹고 짜릿한-교양, 감싸는 듯한-옭아매고 구속하는 듯한-실루엣, 행복한-지긋지긋한-날들, 활짝 웃는 외판원, 섬뜩한-반가운 미사일 경보…
그에 반해, 냉동수면에서 잠깐 깨어났을 때 봤던 일들은, 그때 느꼈던 감정과 함께 너무나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수동 제어 장치 가동. 극저온 상태 해제.]
차가웠다.
“이겁니다. 여기 있습니다.”
너무나도 차가웠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열어.”
성에가 잔뜩 낀 두꺼운 통유리 너머로, 영문을 알 수 없는 정경이 눈에 들어온다. 하얀 연구복을 입은 여자, 머리가 반쯤 벗겨진 주름진 남자, 아마도 자신이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캡슐.
캡슐 문이 열리고, 푸른 옷을 입은 남자의 기침소리, 아이의 울음소리, 그리고 말 소리.
“끝났나요? 우린 괜찮은거죠?”
“거의, 이제 모두 괜찮아질겁니다.”
남자에 품에 안겨있는 아이-짐덩이, 돌덩이, 제발 꺼져-와, 그걸 뺏으려는 흰 옷 여성. 거부하는 캡슐 안의 푸른 옷 남자.
“아니, 잠깐만. 안돼. 아이를 놔!”
머리가 벗겨진 남자가 캡슐 안에 있던 남자를 향해 총을 겨눈다. 그녀는 스스로가 왜 그러는지도 모른 채, 반사적으로 이를 악물고 그 광경과 자신을 갈라놓고 있는 통유리를 두들겨댄다.
‘오 안돼, 안돼 안돼…’
“아기를 넘겨. 두 번 말 안해.”
‘안돼, 멈춰, 제발 그러지 마. 제발..’
“션은 절대 못 줘!”
‘제발 그러지-’
총성.
천둥 같은 총성.
윙윙 울리는 총성의 여운. 순간 그녀의 발 끝에서 치밀어올라 정수리를 궤뚫는 달뜬 듯한 뜨끈함.
닫히는 캡슐. 공기 빠져나가는 소리. 그녀의 폐에서, 마음 속에서 튜브가 형편 없이 찌그러지듯 공기가 날숨으로 나오는 소리. 푸시시식.
“젠장, 아기 갖고 여기서 나가. 가자고.”
다가오는 머리 벗겨진 사내의 얼굴. 살짝 띈 미소. 뭐라 말하는 입. 뭐라 말했는지는 그녀에게 중요치 않았지만, 어찌 되었건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 그 자의 입과 미소. 얼굴에 튄 피.
[극저온 장치 재가동.]
무감정한 목소리와 함께 캡슐 안이 다시 차가워지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더 이상 차가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피부를 얼어붙게 하는 냉기와, 그녀의 몸 안에서 힘차게 용솟음치는 델 듯이 뜨거운 혈류가 서로 뒤섞이는 것을 느끼며, 하얗게 물드는 시야 속에서 그녀는 생각했다.
방금 지나쳐 간 저 자의 얼굴을, 반 쯤 벗겨진 머리처럼 벗겨내면 어떨까 하고.
그 자가 밉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 자가 밉지 않았다. 눈 앞에서 그녀의 반려를-그래, 반려였다. 평생을 같이 할 반려였다-쏘아 죽인 그 자가 밉지가 않았다.
그냥, 얼굴을 벗겨내면 재밌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마침내 시야가 완전한 백색으로 가득할 때 그녀는 깨달았다.
‘나는 자유다. 나는 해방되었다.’
그녀는 활짝 웃은 채로 얼어붙었고, 다음 번에 깨어났을 때 그녀는 웃던 그 모습 그대로 캡슐에서 쓰러져 바닥에 엎어졌고, 바닥에 뒹군 그녀는 아픔 따위는 느끼지 못한 채 바닥을 두들겨대며 폭소를 터트렸다. 한참이나, 한참이나 웃어 대었다.
지금도 그 때의 벅참과 황홀감과 청량함은, 너무나도 선연하게 그녀의 뇌리에 박혀있었다. 그녀는 가끔, 그 순간을 되새기며 스스로 그 기억을 다시 단단하게 그녀의 마음에 찔러 박아넣곤 했다. 천둥과도 같은 총성을 신호로 느낀 기분 좋은 증오와 분노와 고통과 함께, 툭 하고 끊어져서는 그 반동으로 옛날의 그녀를 갈가리 찢어버린 마음 속 닻줄과 살덩이로 조각나버린 옛날의 그녀의 잔해와 함께, 있는 힘껏 증오와 쾌감을 마음 속에 박아넣었다.
왜냐면, 그러면 기분이 너무나도 짜릿했으니까. 한껏 젖어 들어갔으니까.
무엇보다도, 그녀의 삶은, 그 때부터 시작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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