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구하는 자에게 아무것도 없을진저


[콰직]

그녀가 날린 무릎에, 한 놈의 안면이 쓰고 있던 방독면과 함께 형편 없이 우그러지며 뒤로 젖혀졌다.

“씨팔, 대체 뭔”

얼굴이 찌그러진 무뢰배 너머의 폐점포에서 그 광경을 보곤 욕설을 내뱉으며 권총을 치켜 올리던 괴한은, 눈으로 흘러든 땀에 잠시 눈을 감았다 뗀 순간 바로 눈 앞, 그의 가슴께에서 새까만 머릿결이 휘날리는 걸 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왼 뺨과 광대가 터져나가는 고통과 함께 의식을 잃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다른 패거리들은 그제서야 황급히 충격에서 깨어나 각자 무기를-그게 파이프를 얽어 만든 조잡한 권총이건, 몇 십 년이 지났는데도 용케 썩어버리지 않은 당구 큐대건-꼬나쥐고는 그녀에게 달려들었으나, 그들은 너무나도 굼뜨고 설익었다.

손에 쥐고 있던 경찰봉의 끝으로 작은 원을 한 바퀴 그리며 묻어나온 피와 살점을 털어내면서, 그녀는 빈 손으로 방금 전 쓰러트린 자가 쥐고 있던 파이프 권총의 총신을 쥐어 들고는 폐점포의 깨진 유리창을 넘어오려는 자의 눈을 향해 집어던졌고, 그 권총이 놈의 얼굴에 닿기도 전에 겨눠진 총구의 수를 확인하며 점포의 깊숙한 곳으로 몸을 날렸다.

수 자루의 파이프 권총이 소득없이 불을 뿜었고, 그 다음에 닥쳐온 것은 발코니에서 뻗어나오는 고열의 빛줄기 세례였다.

“레이저다! 애슐리가 죽었어!”

“젠장, 저 멀쑥이도 아직도 살아있었어?”

”애초에 죽지도 않았잖아!”

”그 씨발년은 어디로 간거- 아아악!!”

[으르륵, 으르륵]

악에 받쳐 소리치던 마지막 한 놈, 아니 한 년의 권총을 쥔 손을 개 한 마리가 사정없이 물어 뜯으며 늘어졌다. 깡패년은 목청껏 비명을 질러댔으나, 그녀의 동료란 것들은 발코니의 레이저 저격수를 피해서 각자 거리의 엄폐물들 사이로 흩어진 지 오래였다.

고통과 공포에 질려 이제는 죽었다고 자포자기하면서도 몸부림치는 이 깡패 여자의 생각과는 달리, 그녀는 다른 패거리 동료들보다는 좀 더 오래 살 수 있었다. 점포 뒷문으로 돌아나온 그녀에게 경찰봉의 뭉툭하고 묵직한 끝으로 정수리가 박살나거나 목뼈가 어긋나버리며 한 명 씩 최후를 맞이한 그녀의 동료들에 비하면 한 1분 정도는 더 오래 산 셈이었다.

그 1분 동안 손을 물어 뜯는 개를 필사적으로 떼어내려 하며 고통에 시달린 것을 감안할 때, 사실 그리 좋은 일도 아니었다. 뭐, 좋은 일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그녀를 만난 시점에서, 패거리가 가벼운 마음으로 시체 하나를 늘리고자 그녀에게 총을 겨누고 쏜 시점에서, 좋은 일이 일어나긴 힘들게 된 것이다.


“솜씨가 대단하시군요!”

입가에 피를 잔뜩 묻힌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경찰봉 끝으로 널린 시체들을 하나씩 툭툭 건드리며 살피고 있던 그녀에게 생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저 자가 있었군.’

“보아하니 레이더 같지는 않으신데, 우리를 좀 도와주십시오!”

격식있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흑단빛을 띈 얼굴에 베이지 색 코트와 모자를 걸친 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에 이 곳을 올 때 눈에 담아뒀었으나, 싸움 도중에 그녀를 노리지 않아 어느새 잊고 있었던 자였다.

‘무기든 자가 주변에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니. 나도 어지간하네.’

다시는 이딴 형편없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그녀를 향해, 발코니의 사내가 목청껏 소리쳤다.

“이 안에 정착민들이 여럿 있습니다! 레이더들이 이미 건물 안에 들어와있고, 곧 저희가 있는 곳 문을 뚫고 들이닥칠거에요! 당신이 놈들을 뒤에서 쳐준다면 승산이 있습니다! 부탁합니다!”

‘별로 얽히고 싶지는 않은데. 아까도 대가리에 총 맞을뻔 했고.’

그녀가 별 반응 없이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자, 사내는 애가 탔는지 이윽고 뭔가를 들어 올려 바닥을 향해 던졌다.

“지금 던져드린 그건 레이저 머스킷입니다! 이 동네에선 보기 힘든 물건이죠. 그걸 드릴테니 좀 도와주십시오. 정말 부탁합니다!”

다음 순간 사내가 서있던 발코니 뒤켠에서 뭔가 큰 소리가 나고는, 사내의 모습이 발코니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잠시 사내가 사라진 발코니를 바라보다가 다시 시체들을 뒤적여서 시체들이 두르고 있던 고철과 가죽 쪼가리 몇 개를 몸에 동여매고는 사내가 있던 건물의 정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을 옮기던 그녀의 발에 무언가가 채였다. 아까 흑단빛 사내가 던진 전선이 달린 총이었다. 그녀는 그 ‘레이저 머스킷’을 잠시 쳐다보다가, 픽하고 웃음을 흘리고는 총을 밟으며 그대로 건물의 정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촤악>

그녀의 눈 앞에서 피가 눈부시게 터져나왔다. 그녀 생애 처음-처음일까?-맛보는 생피 세례였다.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고 코로 그 기분을 음미하려다, 옆의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우당탕거리는 소리에 바로 바닥으로 몸을 굴려 전시대 뒤로 몸을 숨기고는 오른 손의 경찰봉을 단단히 고쳐잡았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녀의 콧구멍은 벌름거리며 인중에 묻은 남자의 피를 빨아들였고, 입은 쉴새 없이 쩝쩝대고 있었다.

“에잇, 대체 어디- 썅! 여기 엘란이 뒈져있다!! 오른쪽 귀 위가 다 날아갔어!!”

“아가리 함부로 쳐놀리지 말고 조용히 말해! 그 년이 어디서 듣고 있을 줄 알고!”

“여기 어딘가 있는 거 아냐?”

두 쌍의 발 걸음 소리가 전시대 너머에서 울리다, 그녀와 전시대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작게 헐떡이던 숨을 최대한 낮추었다. 한 순간 입에 단내가 고였다.

“진짜 좆같네. 왜 여기서 아직도 이러고 있는거야?”

“뭔 개소리야 그게. 대장 말 못들었어? 캡주머니 놈들이 저 안에 틀어박혀 있잖아.”

“미친 새끼야. 네 뇌는 장식이냐? 어떤 미친 년이 정문으로 들어와서는 우리 애들을 하나씩 작살내고 있다고. 난 씨발 이딴 거지같은 박물관에서 죽치다가 뒤지고 싶진 않아!”

“개수작부리지 마라. 장담하는데, 니새끼가 여기서 튀려고 한다면 대장이 아니라 나한테 뒤지는 거야. 이제 씨발 아가리 좀 하고 집중해. 그래야 저년보다 더 빨리 총 쏠 꺼 아냐.. 저 년이 아무리 날쌔도 총보다 빠르겠-”

다음 순간, 그녀는 불쑥 몸을 일으켜 그녀가 숨어있던 전시대 바로 너머에서 입을 놀리던 자의 목덜미를 잡아채서 그녀 쪽으로 당겨 내동댕이치고는, 오른 손의 경찰봉을 번쩍 들어 역수로 고쳐쥐고는 놈의 목울대를 향해 내리찍었다. 놈의 성대와 목뼈가 함께 짓눌려 버무려지며, 입에서 혀가 용수철 튀듯 튀어나오는 꼴이 마치 광대 장난감이 고장나는 꼬라지였다.

그 소리에 앞서던 놈이 뒤를 돌아 총을 들어 올렸지만 전시대를 가볍게 타넘는 그녀의 발길질에 총을 놓치고 말았고, 이윽고 착지한 그녀가 이번엔 반대편 발로 옆구리를 강타하자 충격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져버렸다. 그 뒤로는 방금 전 동료가 당한 것을 그대로 당하는 것 뿐이었다.

목구멍이 짓뭉개진 시체 두 구에서 권총을 뺏어든 그녀는 잠시 문간에 기대어 바깥을 살피다, 문을 나서 건물의 거대한 홀로 들어서며 눈에 들어오는 자들을 향해 연신 방아쇠를 당겼다. 총 일곱 발의 총성, 왼 손에 든 건 네 발 발사 후 잼이 났고, 오른 손에 든 건 장전된 탄이 세 발 밖에 없었다. 문간에서 눈에 담아뒀던 세 놈 중 고작 한 놈만 쓰러진 걸 보며 작게 욕설을 읊조린 그녀는 총 두 자루를 모두 내던지고 허리에 꽂아뒀던 경찰봉을 뽑아들고는 다시 날듯이 몸을 날렸다.

‘사내놈들 좆대처럼 힘아리 없는 총 같으니라고.’


잠시 후, 남은 두 놈의 가슴 뼈를 박살내고 시체를 뒤적거리고 있던 그녀 뒤로, 문이 활짝 열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열린 문으로 날아들려다, 문간에 아까 본 베이지 색 옷의 사내가 있는 걸 보고 몸을 멈췄다.

“이야,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타이밍 하나는 기막히군요. 프레스턴 가비입니다. 커먼웰스 미닛맨 소속이죠.”

반갑다는 듯이 말을 걸어오는 사내를 향해,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는 다가가 열린 문간을 넘어갔다. 사내가 싱글거리는 얼굴로 문간에서 비켜섰다.

안에는 그녀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사내를 제외하고는, 남자 둘, 여자 하나, 그리고 노인 여자 하나. 사내의 동료들인 듯 했으나 그녀에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에겐 어차피-

그녀가 생각을 이어나가려 하던 찰나, 베이지 빛 코트와 중절모-지금 보니 갈색에 더 가까웠다-를 걸친 사내가 먼저 말을 붙여왔다. 그의 말은 격식을 갖추고 있었으나 산만하고 혼란스러웠으며, 예의를 차리려고 애를 쓰고 있었으나 그걸로는 절박함과 곤궁을 감추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며, 그에게서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을 들었다.

사내는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말해줬다. 국가도 법도 질서도 없고, 사방에 서로를 강도질하려 애쓰는 깡패-레이더라고 부른다-들이 날뛰며, 피부가 벗겨진 500년 이상 된 방사능 인간들이 인간들 속에서 같이 살아가고 그 중 미친 자들은 인간의 생살을 탐한다는 것을. 그 외에 사내가 자기네들이 처한 처지에 대해서 주절대는 것도 있었으나 그녀가 알 바는 아니었다.

“이봐요. 지금 우리가 곤경에 처해있지만 못 빠져나갈 건 아닙니다. 스터지스? 설명해-”

“아니, 됐어요.”

“예?”

흑단빛 사내의 예의바른 얼굴이 일 순간 멍청하게 구겨졌다. 그녀는 면전에서 씩 웃어줄까 하다가, 그 사내가 그녀를 귀찮은 일에 얽매이게 하려던 것을 떠올리고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아까 무서운 괴물 같은 게 온다 했잖아요? 전 별로 얽히고 싶지 않네요.”

“아니, 아직 들어보지도 않았지 않습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옥상에”

“자살행위를 하는 취미는 없어요. 아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굳이 지금 그 취미를 남을 위해 즐기고 싶은 기분은 안드네요. 나 혼자라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데, 내가 당신들을 왜 돕죠?”

“이봐요, 지금 여기 이 사람ㄷ-”


“됐어요. 난 빠질거에요.”

그녀는 심드렁한 얼굴을 보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뒤돌아섰다. 그러자 흑단빛 사내의 얼굴이 당황을 넘어서서 허탈함과 분노로 덧칠되었다.

“그냥 그러깁니까? 에? 여기까지 와놓고 이 불쌍한 사람들보고 죽으라 하는거요?”

날아오는 날카로운 말에, 그녀의 눈이 좁아지며 고개가 살짝 뒤돌아갔다.

“여기까지 뚫어줬으면 충분하지 않나요?”

“제길, 알았습니다.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몸 간수 잘해보시고- 적어도 여기 우리 중 한 명은 살아남겠지. 썅!”

마지막의 상소리에, 그녀는 순간 멈춰서서 잠시 ‘몸을 돌릴’까 하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방을 나서 정문으로 향하는 층계참으로 향했다. 그런 그녀의 뒤편으로, 방금 자신의 목숨이 생사의 저울 위에 올라갔다는 것을 모른 채로, 사내가 여전히 분한 표정으로 짓고 씨근거렸으나 그녀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조용히 정문을 열고 건물을 나선 뒤, 건물로 다가오고 있는 다른 레이더들의 행렬을 몸을 숙여 조심스레 따돌리며, 그녀는 생긋 웃었다. 방금 전에 나눴던 대화가, 정확히는 이 세상이 어떻게 되어있는 지에 대한 설명이 떠올라서였다.

세상은 형편 없이 망가졌다. 그녀에겐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를 얽매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직도 망가지지 않은 부분이 꽤 많이 남아있었다. 그녀에겐 더 좋은 일이었다.

그건, 그녀가 망가뜨릴 것이 남아있다는 의미였으니까. 가지고 놀고, 찢어 부숴트리고, 더럽히고 물들일 것들이 그렇게나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녀의 생긋거리는 미소가 비틀리고 짙어지며, 입가에 침이 잔뜩 고이다 흘러내렸다.

스스로의 생각에, 그녀는 뜨겁게 젖어들어갔다.

1. 흐릿한 옛 날들

“역시, 여전히 흐릿해.”

향긋한 피가 함뿍 섞인 침을 혀 위에서 맛보던 그녀는, 입 안에 집어넣어 빨고 있던 왼 손 집게손가락을 빼내어는 잔뜩 찌푸린 이맛살 위에 가져다 대었다.

여전히 기억나지 않았다.

이마를 짚은 집게손가락 끝 상처에서 핏방울이 샘솟아 그녀의 미간 사이를 지나 콧등을 따라 흐르다, 오른 콧망울 옆으로 빗겨흘러서는 입가로 향한다. 그녀의 혀가 반사적으로 그 핏줄기를 낚아채 맛보지만, 그녀의 기분을 나아지게 하기엔 여전히 부족했다.

“손가락이라도 잘라봐? 아냐, 역시 됐어.”

그녀는 걸터앉아 있던 녹슬고 찌그러진 도로 펜스에서 엉덩이를 떼어서는, 시선을 돌려 끝 없이 펼쳐져 있는, 망가진 차량들이 드문 드문 나뒹굴고 있는 도로 끝 지평선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 피 맛이라도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했는데. 아니, 좀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안개 낀듯한 이 기분이 가시질 않는단 말이야.”

오른 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 자루 끝의 쇳고리에 왼 손 집게손가락을 끼워서 빙빙 돌리며, 그녀의 혼잣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마와 코를 따라 자국을 남긴 핏줄기나, 아직도 생피를 뿜어내고 있는 왼 손 집게손가락이 뭐냐는 듯이. 그렇게 왼 손 집게로 묵직한 쇳덩이 날붙이를 빙빙 돌리던 그녀의 얼굴이, 갑작스레 생글거리는 미소를 띄며 확 밝아졌다.

“아, 그래! 역시 네 피를 마셔보는 게 좋겠어. 어떻게 생각해?”

마치 친한 친구에게 방금 들은 생각을 말하는 것 마냥, 홱 돌아선 그녀 앞에는 사지와 몸통 곳곳에 상처가 난 채 간신히 비칠거리는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사내 한 명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생글대며, 날붙이를 오른 손으로 다시 바꿔쥐고는, 사내 앞에 쪼그려 앉아 그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올려선 땀과 아스팔트 그리고 방사능 분진으로 더러워진 그의 목에 칼의 얼룩을 천천히 비벼 닦아내기 시작했다.

“왜 말이 없어? 누가 혀라도 뽑은 마냥.”

“으어어, 아으, 어으아으.”

“아, 그래. 내가 뽑았었지? 손가락도 그때 깨물렸고. 어때? 내 손가락 살점은 맛있었어?”

“아으, 아어으에오.”

“어머, 뱉어낸거야? 아깝게시리. 나같은 미녀를, 말 그대로 ‘먹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녀는 두려움에 찬 사내의 눈을 바라보다, 문득 그 두 눈을 뽑아내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 생각에, 등골에 한 순간 찌르르한 느낌이 타고 흘렀다. 사내의 동공에 손을 가져다댈까 하다가, 한 손은 사내의 머리채를 틀어 쥐고 있고, 다른 한 손에는 날붙이를 쥐고 있는 것에 생각이 미쳐서 그만두었다.

머릿 속 안개가 그녀의 단기 기억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고개를 한 번 저어 가벼이 떨쳐내었다.

“그래그래, 세상 만사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지. 뭐,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 내가 오늘 너한테 갑자기 시비가 털려서 기분도 안 좋고 한데, 네 피를 마셔보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거든. 어떻게 생각해? 확실히 효과가 있을 거 같지 않아?”

그녀는 이제 생글거리는 걸 넘어 만면에 활짝 웃음을 띄고는, 섬뜩하며 아름다운 안면을 사내에게 들이밀었다. 사내의 코와 그녀의 코가 맞닿을 듯 말듯했고, 그녀의 코와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숨결이 사내의 콧구멍을 간질거렸지만, 혀뿌리가 뽑혀나간 고통과 공포에 물든 사내에겐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저, 잘려나간 혀와 움직이지 않는 사지를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목숨을 구걸해보려 애쓸 뿐.

다행히도, 사내 앞의 여자는 그런 공포에 찬 반응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는 여자였다.

“아, 살려달라고? 네가? 길거리 위에서, 반반한 여자 하나 발견했다고 손에 든 쇠몽둥이와 발딱 선 좆몽둥이를 같이 휘두르며 달려들던 네가? 살려달라는 거야? 내 머리를 후려쳐서 골통을 깨부순 다음 버르적거리는 몸뚱이를 잔뜩 가지고 놀 상상에 젖어서는 바지 끝도 축축하게 적시고는 달려들던 네가?”

그녀는 깔깔 웃어댔다. 청량하고, 맑고, 섬뜩한 웃음소리의 칼날이 황무지 공기를 찢어발겼다. 그와 함께, 사내의 목에 비벼지던 날붙이의 날끝이 사내의 피부에 스며들었다.

“뭐, 그래 좋아. 살려주지.”

웃음 끝에 나온 그녀의 말에, 사내의 눈이 백열전구만치 크게 뜨이고, 입꼬리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오른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으지직, 촤악]

목에 통짜 쇳덩이 날붙이가 틀어박히는 소리, 날붙이 톱니가 핏줄과 뼈와 살점을 잡아 찢듯 가로지르는 소리, 피분수가 공기 중에 파도치는 소리, 목과 몸을 연결하던 살가죽이 우악스런 힘으로 뜯겨지는 소리.

“아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핫!!”

오른 손엔 날붙이를, 왼 손엔 뜯겨진 머리통을 들고는 미친 듯이, 아니 미쳐서, 완전히 돌아버려서는 연신 웃어제끼며 빙빙 돌아대는 그녀의 웃음소리.

어느 새 그녀는 날붙이마저 내던지고는 마치 사랑하는 연인의 손을 맞잡은 소녀 마냥 양 손으로 사내의 머리통을 붙잡고 제자리에서 돌아대었다. 그녀에게 붙들린 머리통의 두 눈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그녀의 맑은 웃음을, 너무나도 밝아 진저리가 나는 그녀의 웃음에 머리통이 붙들리듯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사내는, 그 순간 생각했다. 너무나도 얼토당토 않은 생각이었지만, 그 사내는 생각했다.

‘너무나 아름답다. 갖고 싶다. 가져서 마구..’

그걸 마지막으로 사내의 생각은 끊겼고, 그녀는 이제 숫제 쥐불을 휘두르듯 사내의 머리채를 쥐고는 빙빙 돌려대고 있었다.

그녀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던, 머릿속 안개는 몰려오는 상쾌함에 온데간데 없이 가신지 오래였다.


그녀는 옛 일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옛 일을 생각하려고 하면, 안개가 몰려왔다.

그녀의 기억력엔 문제가 없었다. 그녀는, 볼트를 나온 뒤로부터 겪었던 모든 삶의 순간 하나하나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이 흐려지는 부분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건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해 그녀는 왠만한 사람들보다 훨씬 기억력이 좋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옛 일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기억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녀는 그렇게 자주는 아니지만 옛 일을, 정확히는 볼트에서 냉동수면장치에 몸을 뉘기 전의 일을 기억해보려고 애썼다. 그럴 때면, 잔뜩 구겨진 꾸깃꾸깃한 종이 뭉치의 겉부분 마냥 몇 몇 상이 떠오르긴 했다.

캐나다의 사창가, 성난 사람들, 군인들, 난교, 깨진 유리창, 법정에서 교활하게 말을 쏟아내는 자신, 비열한 웃음, 사람들에게 받는 축하와 가식적인-역겹고 짜릿한-교양, 감싸는 듯한-옭아매고 구속하는 듯한-실루엣, 행복한-지긋지긋한-날들, 활짝 웃는 외판원, 섬뜩한-반가운 미사일 경보…

그에 반해, 냉동수면에서 잠깐 깨어났을 때 봤던 일들은, 그때 느꼈던 감정과 함께 너무나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수동 제어 장치 가동. 극저온 상태 해제.]

차가웠다.

“이겁니다. 여기 있습니다.”

너무나도 차가웠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열어.”

성에가 잔뜩 낀 두꺼운 통유리 너머로, 영문을 알 수 없는 정경이 눈에 들어온다. 하얀 연구복을 입은 여자, 머리가 반쯤 벗겨진 주름진 남자, 아마도 자신이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캡슐.

캡슐 문이 열리고, 푸른 옷을 입은 남자의 기침소리, 아이의 울음소리, 그리고 말 소리.

“끝났나요? 우린 괜찮은거죠?”

“거의, 이제 모두 괜찮아질겁니다.”

남자에 품에 안겨있는 아이-짐덩이, 돌덩이, 제발 꺼져-와, 그걸 뺏으려는 흰 옷 여성. 거부하는 캡슐 안의 푸른 옷 남자.

“아니, 잠깐만. 안돼. 아이를 놔!”

머리가 벗겨진 남자가 캡슐 안에 있던 남자를 향해 총을 겨눈다. 그녀는 스스로가 왜 그러는지도 모른 채, 반사적으로 이를 악물고 그 광경과 자신을 갈라놓고 있는 통유리를 두들겨댄다.

‘오 안돼, 안돼 안돼…’

“아기를 넘겨. 두 번 말 안해.”

‘안돼, 멈춰, 제발 그러지 마. 제발..’

“션은 절대 못 줘!”

‘제발 그러지-’

총성.

천둥 같은 총성.

윙윙 울리는 총성의 여운. 순간 그녀의 발 끝에서 치밀어올라 정수리를 궤뚫는 달뜬 듯한 뜨끈함.

닫히는 캡슐. 공기 빠져나가는 소리. 그녀의 폐에서, 마음 속에서 튜브가 형편 없이 찌그러지듯 공기가 날숨으로 나오는 소리. 푸시시식.

“젠장, 아기 갖고 여기서 나가. 가자고.”

다가오는 머리 벗겨진 사내의 얼굴. 살짝 띈 미소. 뭐라 말하는 입. 뭐라 말했는지는 그녀에게 중요치 않았지만, 어찌 되었건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 그 자의 입과 미소. 얼굴에 튄 피.

[극저온 장치 재가동.]

무감정한 목소리와 함께 캡슐 안이 다시 차가워지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더 이상 차가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피부를 얼어붙게 하는 냉기와, 그녀의 몸 안에서 힘차게 용솟음치는 델 듯이 뜨거운 혈류가 서로 뒤섞이는 것을 느끼며, 하얗게 물드는 시야 속에서 그녀는 생각했다.

방금 지나쳐 간 저 자의 얼굴을, 반 쯤 벗겨진 머리처럼 벗겨내면 어떨까 하고.

그 자가 밉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 자가 밉지 않았다. 눈 앞에서 그녀의 반려를-그래, 반려였다. 평생을 같이 할 반려였다-쏘아 죽인 그 자가 밉지가 않았다.

그냥, 얼굴을 벗겨내면 재밌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마침내 시야가 완전한 백색으로 가득할 때 그녀는 깨달았다.

‘나는 자유다. 나는 해방되었다.’

그녀는 활짝 웃은 채로 얼어붙었고, 다음 번에 깨어났을 때 그녀는 웃던 그 모습 그대로 캡슐에서 쓰러져 바닥에 엎어졌고, 바닥에 뒹군 그녀는 아픔 따위는 느끼지 못한 채 바닥을 두들겨대며 폭소를 터트렸다. 한참이나, 한참이나 웃어 대었다.

지금도 그 때의 벅참과 황홀감과 청량함은, 너무나도 선연하게 그녀의 뇌리에 박혀있었다. 그녀는 가끔, 그 순간을 되새기며 스스로 그 기억을 다시 단단하게 그녀의 마음에 찔러 박아넣곤 했다. 천둥과도 같은 총성을 신호로 느낀 기분 좋은 증오와 분노와 고통과 함께, 툭 하고 끊어져서는 그 반동으로 옛날의 그녀를 갈가리 찢어버린 마음 속 닻줄과 살덩이로 조각나버린 옛날의 그녀의 잔해와 함께, 있는 힘껏 증오와 쾌감을 마음 속에 박아넣었다.

왜냐면, 그러면 기분이 너무나도 짜릿했으니까. 한껏 젖어 들어갔으니까.

무엇보다도, 그녀의 삶은, 그 때부터 시작이었으니까.

시티 오브 히어로 기행기, '뭉그러져, 아름답게' 소개.


이전에 첫 편을 썼다가 시간 관계상 중단되었던 시티 오브 히어로 여행기, 블로거 쪽에서 함께 새로이 시작해보려 합니다.

다만, 시티 오브 히어로 플레이 경험을 기반으로 하되, 제 나름의 이야기와 세계를 덧붙여서 저만의 이야기로 물들여서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블로그에서도 이미 논한 바 있지만, 본격적인 글에 앞서 이 글과 관련된 저작권 이슈에 대해 논하고 넘어가겠습니다. 

현재 시티 오브 히어로는 공식적으로 서비스 종료된 지 10년이 넘었으나, 여전히 많은 수의 유저 서버가 살아있으며 저작권자인 Ncsoft는 시티 오브 히어로에 관한 어떠한 사업도 진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운영되고 있는 유저 서버 중 New Dawn 서버에서 진행하는 플레이 경험을 바탕으로 저만의 생각과 상상을 덧붙여서 엮어내는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시티 오브 히어로에는 독자적인 세계관이 있으나, 서비스 종료된 온라인 게임의 특성 상, 그 이야기의 끝은 완전히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제 나름의 세계로 재해석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합니다.

다만, 원본이 되는 임무와 대화문 스크립트를 확인할 수 있는 웹페이지 링크를 이야기를 써나가면서 꾸준히 안내해드리고자 하니, 필요하신 분께는 참고되시길 바랍니다.

뭐, 거창히 이야기했지만 실제로는 아마 시오히 내용을 많이 따라가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이쪽도 성인물 요소가 있을 가능성도 있어서 블로거에 같이 글을 올립니다.


여행을 떠날 주인공의 모습입니다.

폴아웃 4 기행기, '젖어버린 황무지, 피에' 소개

새로 쓰게 되는 '젖어버린 황무지, 피에'는 제목 그대로 폴아웃 4에서 즐겼던 일을 소재로 작성하는 일종의 2차 창작입니다.

다만 본편의 스토리와 별개로 제 나름대로의 변주가 들어갈겁니다.

게임 스크린샷이 보조적인 장치로 쓰일거고, 올라가는 스크린샷은 성인물 요소를 다수 포함할 가능성도 있어서 일단 블로거에 성인 표시를 해놨습니다. 실제로는 글로 된 묘사를 빼면 성인 요소는 거의 없을겁니다.

포스타입에 쓰려고 하다가, 그냥 이쪽이 나을거 같아서 이쪽에 올리게 되네요.

제가 쓰고 싶을때 쓰는거라, 부정기 연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누가 이걸 볼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럼, 모험을 함께할 주인공 여캐의 모습을 보시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시범 2차

 카테고리 허브 테스트용

관측소 시범가동

 시험용 포스팅


과연 앞으로 이 블로그를 계쏙 쓸 것인가 확인해보고자합니다.